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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읽기

아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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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툭, 미샤 다미얀 글, 요쳅 빌콘 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아툭은 복수와 사랑,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스키모 소년인 아툭이 아끼는 개 타룩을 늑대에게 잃고 늑대를 죽임으로서 복수를 하지만, 그것이 모두 덧없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서 동물의 생태계에 관해서 생각하지는 않겠다.

아툭이 속한 에스키모족이 사냥을 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늑대도 뭔가를 잡아먹어야 생존할 수 있으니, 엄밀하게 말해서 늑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작가 미샤 다미얀​도 그런 사실은 차치하고 우리 인간 삶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원망과 복수와 용서를 다루고 있으니, 나도 그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늑대는 아툭의 아끼는 개 타룩을 잡아 먹는다.

아툭은 이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복수할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다행히 아툭은 최고의 사냥꾼으로 성장을 했고, 타룩의 복수를 위해 늑대를 죽인다.

그러나 그 복수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고 마음아파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늑대가 아툭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 아툭이 늑대를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되묻고 싶다.

용서는 사과를 했을 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과를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용서를 한다는 건가?

이럴 때의 용서는 약한 사람이 복수를 할 수도 없으니, 마음이나 달랠 요량으로 '복수는 덧없어! 내가 용서를 해야지!' 하는 식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그건 진정한 용서도 아니다.

다행히 아툭은 강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툭이 '나는 늑대를 죽일 능력이 충분하지만, 이런 식의 복수가 무슨 가치가 있나?' 깨닫고 늑대를 죽이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다.

작가도 이런 점을 아툭이 뒤늦게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이다.

늑대를 죽이면 복수가 완성될 줄 알았는데,​ 타룩이 살아돌아오지도 않았고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친구도 없다.

그러니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작가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폭력의 가해자의 편을 든다.

'우리가 당한 것이 있지만, 복수를 한들 무슨 이득이 있나?'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았고 광주민주항쟁의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가해자 누구도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 피해자는 용서를 해야 한단다.

그래서 '아툭' 그림책은 작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가해자의 편을 드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누구 편을 드는 생각이 숨어 있나?를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 건 중요하다.

아툭은 이런 점 때문에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요쳅 빌콘의 그림은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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