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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조병화의 낙엽끼리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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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깜짝 할 사이에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고 어느새 주변은 붉은 단풍으로 아름답다.

오늘은 아직 물이 깊이 들지 않은 붉은 단풍길을 걸어, 볼일을 보러 시내를 다녀왔다.

찬란하기만 한 단풍을 보는데 갑자기 슬픈 생각이 난 것은 스산한 가을 공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조병화 시인의 '낙엽끼리 모여 산다'를 떠올렸다.

조병화 시인은 이 시를 아마도 나처럼 50이 넘은 나이나 아니면 더 지긋한 연세일 때 쓴 것이 분명하다.

인생의 가을 같은 시절을 살면서 지난 슬픔에 너무 담담하다.

아무리 애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제 그것에 더는 베이지 않는다.

절대로 젊은 날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와 함께, 세월과 함께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이 요즘은 많다.

이 시가 꼭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시에서 '비 내리는 날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라는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든다.

'슬픔을 디딘다'는 표현이 너무 좋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단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끼리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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