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

박용철의 '안 가는 시계' ​​나무에 매달린 박용철 시인의 짤막한 시는 우리 동네 도서관 뜰에서 발견한 것이다.옛날부터 단 한줄로 이루어진 시들 중에는 사물이나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것들이 많았다.이번에 본 박용철의 '안 가는 시계'도 그런 시 중 하나이다.망가져서인지, 아니면 배터리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멈춰진 시계를 보고 한 시인의 말은 참으로 절묘하다.멈춰진 시계에 대한 시인의 느낌이 너무 적확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무엇보다 혼자 배시시 웃었다.'엄숙한 얼굴'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안 가는 시계 박용철 네가 그런 엄숙한 얼굴을 할 줄은 몰랐다
조병화의 낙엽끼리 모여 산다 눈깜짝 할 사이에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고 어느새 주변은 붉은 단풍으로 아름답다.오늘은 아직 물이 깊이 들지 않은 붉은 단풍길을 걸어, 볼일을 보러 시내를 다녀왔다.찬란하기만 한 단풍을 보는데 갑자기 슬픈 생각이 난 것은 스산한 가을 공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그러다가 문득 조병화 시인의 '낙엽끼리 모여 산다'를 떠올렸다.조병화 시인은 이 시를 아마도 나처럼 50이 넘은 나이나 아니면 더 지긋한 연세일 때 쓴 것이 분명하다.인생의 가을 같은 시절을 살면서 지난 슬픔에 너무 담담하다.아무리 애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이제 그것에 더는 베이지 않는다.절대로 젊은 날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와 함께, 세월과 함께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이 요즘은 많다.이 시가 꼭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
장석주의 '대추 한 알' ​10월이 다가 오니, 우리 동네 아파트 화단에 있는 대추도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색깔이 짙어지는 대추를 보니, 가을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그러면서 장석주의 '대추 한알'이라는 시가 떠올랐다.그냥 가을이 오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특히, 개인적으로 이번 여름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우리 동네 하천에 사는 집오리들 때문에 태풍과 장마, 더위가 예전같이 느껴지지 않고 내내 마음 졸이는 걱정거리였다.그러던 끝에, 바로 가을의 문턱에서 5마리의 오리들 중 4마리가 죽었다.그러고 나니, 대추가 익어가는 모습이 감동스럽기만 했다.여름의 악천우와 병충해를 모두 극복해서 열매를 맺고, 그것을 잘 익히고 있는 대추나무가 대견스러운 느낌이다.자연에서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기적이라는 걸 이번 여름에 배웠다.장석주 ..
권서각의 '지난여름' ​곽서각 시인의 '지난 여름'은 처음 보는 시다.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데...눈물이 난다.곽서각 시인은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리움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표현하는 분 같다.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리움과 그것으로 인한 마음아픔이 오롯이 살아나, 슬프다. 지난 여름 곽서각 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바닷가 언덕에 모여 근심하였네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손가락에 눈물 찍어 어둠에 대고 꼭 눌러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썼네흩어진 별의 뼈허물어진 모래성을 지나지난 여름 바닷가 빈 마을로파도는 빈손으로 물 만지러 간다파도는 배가 고파 물 먹으러 간다파도는 눈물이 나서 물보러 간다
정끝별의 '처서' ​처서가 지나고 8월도 지나, 9월이 시작되니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분다.그래서 가디건을 찾고, 좀더 긴 옷을 챙겨입게 된다.'정끝별' 시인의 '처서'를 읽고서야 매미 노래소리가 멈췄다는 걸 기억해냈다.언제 멈춘걸까?영영 올 것 같지 않았던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금방 가을이 올 것 같다. 처서 정끝별모래내 천변 오동가지에맞댄 두 꽁무니를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사랑을 나누는 저녁매미 단 하루단 한사람단 한번의 사랑을 용서하며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팔월도 저문 그믐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복효근의 '산길' ​복효근의 '산길'이라는 시는 우리나라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을 잘 그려 놓았다.산의 정상에서 보면, 정말 너른 세상보다 너 높고 너른 산들이 보인다.그것은 높은 산일수록 더 심하다.너른 산들이 병풍처럼 첩첩 둘러쳐가며 풍경을 만들고 있는 우리나라의 산세를 우리 인간사와 연결해서 공감가게 잘 표현했다.인생의 고단함이 끝이 없듯이 산은 우리가 헤쳐가야 할 봉우리들을 끝도 없이 펼쳐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슬프거나 고단하게 느껴지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로, 용기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복효근의 '산길' 시의 장점이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기상이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산세를 떠올리며 이 시를 읽었다.그 기상 때문에 시가 회의적이지 않고 건강하게 느껴지나 보다. ..
백석의 '바다' ​나는 백석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철저하게 월북한 카프문학가들의 책을 금서로 정해, 읽지 못하게 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혀 읽을 수가 업었다.그 뒤, 월북작가의 작품들이 해금되어 많이 출판되었지만, 그때는 시에 대한 흥미가 조금 멀어진 때라 또 골라서 읽지 못했다.우연히 도서관 책꽂이 모퉁이에서 발견한 백석의 시는 정치적이지도 이념적이지도 않다.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 뿐이다.더 젊었을 때, 카프 문학작품들을 보았으면 어땠을까?당대의 가장 지적이고 인텔리들이었다는 그들의 작품들을 읽었다면, 문학에 대한 감수성을 더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무엇보다 감동적인 문학작품을 더 많이 읽었을 것이다.백석의 바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운율도 무척 리듬감있고 각운까지 맞춰서 ..
박남준의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박남준 시인도, 그의 시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도 다 처음 보는 것이다. 오동꽃이 지는 모습이 '후두둑 눈물처럼'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서 나도 지는 오동꽃을 떠올렸다.공감이 가는 표현이다.'맞아! 오동꽃은 그렇게 슬프게 떨어지지..'하면서 시를 읽었다.시인의 그리움이 슬프면서도 담담하게 표현되었다는 느낌이다. 박남준의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시는 행 나눔이 돋보인다.그것이 주는 리듬감이 시인의 감정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그리고 이러한 행 나눔이 감정의 여백과 절제를 담당한다는 인상이다.시인의 이런 글쓰기 무척 마음에 든다. 박남준의 다른 시들도 궁금하다.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박남준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덧없고 덧없는지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